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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족보

고려시대 윤관 장군의 동북 9성의 비밀~~~!!!

고려시대 윤관의 동북 9성의 비밀

2007년 12월 12일 오후 9:14공개조회수 4 6

관은 별무반 17만대군을 이끌고 당시 고려의 동북(東北)지방에 9성을 쌓습니다.

고려 숙종은 윤관의 건의에 따라서 기병의 신기군, 승병의 항마군, 보병의 신보군으로 별무반을 편성합니다. 고려 예종 2년(1107) 윤관. 오연총등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토벌하여 고려의 동북지방에 9성을 개척합니다(1107)
윤관의 동북(東北) 9성은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통태진, 숭녕진, 진양진입니다. 이 9성의 위치를 현사학계에서는 지금의 함흥평야 일대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대부분 이렇게 배우시고 외우고 했을 것입니다만, 이것도 역시 숨기고 지나쳐 버린 역사입니다.
위와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당시 고려는 한반도에 있었고, 그 동북지방이면 함경도 지방이 되므로 그렇다고 합니다. 누구나 당연히 여기고, 그리고는 슬쩍 이 부분을 넘어갑니다. 그냥 넘겨 버리면 너무나도 완벽한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함흥평야일대가 수 십만 대군으로 지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요? 또한, 17만 대군이 동북지방으로 갔다면 반대쪽은 거란의 침입에 방비해서 또한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을 것이고(예를 들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서 광군 30만을 편성합니다), 남쪽지방은 왜구의 침략등에 대비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중앙에도 예비병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과연 고려의 군대는 백만대군에 달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고려 이전에 백제는 이미 백만이 넘는 대병을 보유했다는 기록이 대륙의 사서에는 남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의 역사로는 해석이 안되어서 그냥 넘어갑니다.
어쨌든간에 당시 상당한 많은 고려군이 투입되어 여진족과의 전쟁에 나가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능한 사실인가요? 아니면 반도에 고려가 있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을까요?
사학계에서는 너무도 많은 병력으로 인하여 기록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주장과 맞지 않는 다고 역사기록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일본이니 중국의 사학자들과 차이점이 있을 수가 있나요? 참고로 사학계에서 추정하는 조선중기의 인구는 150만명정도라고 합니다. 중세시대의 인구증가가 완만하다고 가정하면, 고려시대에도 이 정도의 인구이거나, 더 적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너무 많은 병력이 기록되었다고 하지만, 밑에서 제세한 그림에 의해서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면 너무도 당연한 병력일 것입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은 나라가 많은 병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려가 과연 반도의 작은 국가였을까요?
현 사학계내에서도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그냥 함흥평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일본인들이 그렇게 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론은 지금도 채택되어 우리 교과서에 남아 있습니다. 그 반론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반론이 있음에도 그렇게 가르친다면 수 많은 일반인들은 그렇게 인식하게 될 것이고,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오히려 이상해 할 것입니다.
동북9성의 위치를 진정으로 찾고자 한다면, 고려의 위치를 먼저 지금의 위치로 확정한 다음, 사료에 나오는 역사적인 현장의 위치를 정해서는 안됩니다. 고려의 위치자체가 부정확하다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사료에 나오는 지명을 근거로 고려의 위치를 정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가 아닐까요?




여러분은 이렇게 알지만...

이것이 당시의 실제상황이다.

북9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증거로는 세종대왕을 들 수 있겠습니다. 세종대왕때 4군, 6진을 개척하려고 하자, 중신들이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윤관이 쌓은 동북 9성중, "공험진"이 북만주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북방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정확한 동북 9성의 위치는 모두 협력해서 고증해 나가야 하지만, 한가지 공험진이 분명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9성중의 하나라는 것이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것도 조선과 명나라의 중간지점부근에 위치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사실에 미루어보아 함흥평야에 동북9성이 있지 않았다는 근거가 됩니다. 만일 동북9성이 함흥평야에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이라고 우기는 4군 6진을 개척했다면 오히려 진출이 아니라 거꾸로 반도로 내려와야 합니다
. 9성이 지금의 함흥평야 일대라면 4군 6진개척의 근거가 될 수 없겠지요..다시 말해서 공험진을 비롯한 동북 9성이 김종서등이 개척한 4군6진보다 조선의 입장에서 더 멀리 있어야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개척의 명분이 되지, 함흥평야에 고려 9성이 있었다는 것을 기반으로 지금의 압록강이나 두만강으로 진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8성은 함흥평야에 있고, 나머지 공험진은 북만주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과연 그것이 방어에 적합합니까? 즉, 그렇다면, 공험진은 윤관의 통제하에서 방어가 질 수가 없는 고립된 위치에 놓여 있게 되어 여진족의 줄기찬 공격으로 단번에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9성은 유기적인 조직으로 인하여 여진의 침략을 막아냅니다. 또한 만일
북만주에 9성이 있었다면 그것이 과연 고려의 동북지방에 위치합니까?(그림참조)
오히려 동북 9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서북 9성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고려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반도에 있었다면 동북 9성이 될 수가 없겠지요.. 대륙에 있어야 북만주 일대가 동북 9성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방어에도 적합하게 됩니다.. 만일 고립이 된 곳이라면 여진이 쉽게 취할 수 있었겠지만,여진은 동북 9성을 빼앗기 위해 수 차례에 걸쳐 침략을 감행하다가 도저히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깨닫자, 돌려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백두산이 아직 폭발(10세기초~14세기초)을 하고 있을 때인데, 더군다나 공험진은 화산에서 나오는 용암과 화산재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 고려군은 여진족은커녕 용암에 전멸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역사는 자연과학으로는 전혀 설명이 안되는 역사입니다.그래서 이공계기피현상이 오는 것일까요?
과연 함흥평야가 동북9성이었다면 광활한 만주벌판을 내 버려주고 그들이 함흥평야에 집착한 이유는 뭘까요? 곡창지대라서? 하지만, 만주벌판은 더 넓은 곡창지대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영토에 많은 목숨을 걸 필요성이 있을까요? 아니면 동북 9성은 여진에게 위협이 될만큼 광활한 영토였을까요? 만일 동북 9성이 그렇다면 고려의 영역은 동북9성보다 작았을까요? 요즘으로 설명하자면 휴전선의 비무장지대가 대한민국보다 넓었다고 주장하는 것고 같은 것입니다. 배보다 배꼽이 클 수는 없는 것입니다.
9성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인접하여 근거리로 있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북만주가 고려의 동북지방이라면 고려의 위치는 반도에 국한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과연 두만강과 압록강이 우리의 강역의 경계가 된 것은 언제일까요? 과연 김종서와 최윤덕은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밖에 못갔던 것일까요? 역사를 설명이 안된다고 대충 가르치고 무마하려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다시 고증해야 합니다. 역사스페셜에서도 이 부분을 다룬 다고 하고서 수 년이 지나도 방영이 없는 것을 보니 우리의 역사 언제 바로잡아질 것인지..

"사돈"의 유래

자식들을 서로 결혼시키고 나면 두 집안은 사돈이 됩니다. 그 "사돈"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사람이 바로 고려시대의 윤관입니다. 사돈을 맺자는 말은 고려 동북지방을 정벌했던 윤관과 오연총장군에게서 시작합니다. 이 두 사람은 수년간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이로 사이가 돈독하였다고 합니다. 둘은 또한, 술을 좋아하여 두 장군은 항상 술을 같이 마셨습니다.
어느날 윤관이 술생각이 나서 하인에게 술을 가지고 오연총장군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오연총장군집에 가는 도중에 개울이 있었는데, 마침 소나기가 쏟아져서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그냥 물끄러미 개울 건너를 쳐다보고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개울 건너편에서 오연총장군이 하인에게 술동이를 짊어지게 하고 윤관장군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에 넘친 개울 때문에 건널 수는 없어 둘은 개울 양둑에 있던 잘라놓은 나무등걸에 앉아서 서로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서로에게 술을 권하면서 취하도록 마셨다. 그러면서, 서로의 자녀를 혼인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여기서
"기울어진 나무등걸"이라는 의미로 "사돈"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후, 글자는 다소 변했지만, 유래는 그렇습니다. 혹자는 사돈의 고사를 오연총장군이 나무위로 올라가 거기서 고개를 숙이면서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라도 술을 마셔야 하겠습니다"하며 개울 건너편에 있는 윤관장군에게 말하자 윤관장군 역시 그곳의 나무에 올라 같이 머리를 숙이며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사돈이란 "나뭇가지 사, 머리숙일 돈"이라는 뜻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후세에 사람들이 자식들을 혼인시키고자 할때 이들의 고사를 떠올리며 "우리도 사돈해볼까"라고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Scrap: 푸른하늘 구름산

이 글에 대한 신고

  • 말대가리 말대가리
    ㅎㅎㅎ~~~!!!
    마자요~~~!!!
    그래도 자랑스런 선조 임니다요~~~!!!
    • 강화도 강화도
      ㅎㅎㅎ 옆지기랑 종씨님. 잘 보았습니다.
      행복한꿈 구셔요. ^^*
      • 말대가리 말대가리
        ㅎ~~~!!!
        형님~~~!!!
        사돈만
        배워 가시지 말고
        울 할아버지도요~~~ㅎ
        • 고락산성 고락산성
          국력이 제일이지요.
          사돈~!
          배우고 갑니다.
          • 말대가리 말대가리
            형님~~~!!!
            감사 함니다.
            윤관 장군은 저의 시조(윤 신달:신라 도독부)로 부터
            5대 손자 임니다.
            형님~~~!!!
            늘 자랑스럽게 생각 하면 살고 있슴니다요~~~!!!
            • 탄곡 탄곡
              • 탄곡
              • 2007년 12월 24일 오후 10:25
              실효지배를 하고 있는 쪽의 기록에 이의를 제기해도 마이도풍이지요.
              만주가 우리 땅이라고 아무리 해봤자...
              '사돈' 잘 배우고 갑니다.
              즐거운 성탄 전야(이브) 되세요.